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악장

피 흘리는
고통이 없고서는
열매 맺을 수 없는 법
바닥에 굴러떨어져
썩지 않고서는
꽃 피울 수 없는 법

얼음에
살이 찢겨나가고
불에
뼈가 시꺼멓게 타버린 뒤에
흘린 눈물을 모아 만든
가을은
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
2악장을 닮았다

바람 한 줄기가
밤사이에 축축하게 젖은
세상을 흔들고
잎들은
선율에 맞춰 몸을 흩날리는데
지극한 사랑으로 얻어낸
결실이 허공에 묵직하게 매달려있다

지금부터
새로운 하늘이 펼쳐질 것이니
모두 눈 감아라 한다
가슴을 활짝 열어두고
깊은 강물처럼 흘러가라
어두운 숲처럼 적막하라

by 구석기 | 2009/11/14 10:37 | 구석기의 시 | 트랙백 | 덧글(0)

시간 여행

지상의 그 모든
무기를 빼앗아버리고
11월의 가을처럼
가장 순하고 맑은
날로 돌아가고 싶을 때
째깍째깍, 재촉하는
시계바늘을 멈춰 세워놓고
시간 속으로 첨벙, 가라앉으면
벌거벗었어도 부끄러움 모르고
저절로 익은 열매 따먹었던
그 착한 눈빛을 만날 수 있으려나

시간은
씨앗 같은 것이라서
뿌리를 내리고
수직으로 뻗어가는 것
꽃 진 후에 단풍으로 물드는 것
주렁주렁 매달리는 것
마침내 툭, 떨어져 썩어가는 것
실은 그 모든 것이
시간의 그릇 속에 오롯이 담겨있어서
문득 바라보는 일조차
생生에서 생生으로의
여행이 되는 것이다

시간으로 만들어진
몸들이 허공으로 흩어진다
태초의
그 숲속을 단걸음에 다녀왔다
 

by 구석기 | 2009/11/13 09:50 | 구석기의 시 | 트랙백 | 덧글(0)

가래떡을 먹다

늦가을
오늘처럼  
먼데서 손님 오시면
어머니는 남겨놓은 가래떡을 쓸어
떡국 끓여 내오셨다

바람 불고 추운 날에는
밥보다
뜨거운 국 한 그릇이 낫다며
찬도 없는 밥상에
막사발로 고봉으로 담아놓으셨다

정월도 아니건만
생일이라고
한 살 더 먹은 것도 아니건만
어두운 구름 낀
오늘 같은 날에는
말간 떡국 한 그릇 먹고 싶어서

잎 다 떨어지고
앙상한 나뭇가지를 보니
세월로 말라비틀어지고
울긋불긋 곰팡이 핀
가래떡 같은
어머니 젖가슴이 그리워지네

뼈만 남아서
단단하게 굳어버린
가래떡 같은 어머니
한 입 덥석 베어물고
씹어 먹는데
가시처럼 걸렸으니 목이 메인다

by 구석기 | 2009/11/11 10:07 | 구석기의 시 | 트랙백 | 덧글(0)

그 모든 것의 끝

목을 베었을 때
피가 흘러내렸다
그 피가 배인 땅바닥에서
대궁이 일어섰다
꽃이 핏덩어리였다
잎들은 잠시 푸른  몸으로 감싸안았다
굵고 단단한 열매는 눈물이었다
그 모든 일이
새벽에서 밤까지
단 하루만에 일어났다

밤에서부터
그 다음 새벽 사이에
최후의 반격이라고
세상이 노랗게 물들었다
노란 비가 창문을 때리기 시작했다
노란 꽃이 떨어졌고
노란 잎들이 우수수 졌다
노란 열매가 한꺼번에 무너져내렸다

손 내밀 수 없는 절망이었다
다시 일으켜 세울 수 없는
온몸이 황달 같은  
멸망이었다

그때 새 한 마리
나무에 날아와 앉아 알을 낳았다
해가 떴다
그 모든 것의 끝은
잉태하는 것이었다
빛으로써 빛을 갚는 것이었다
노란 낙엽이 부서지기 시작했다

by 구석기 | 2009/11/10 09:50 | 구석기의 시 | 트랙백 | 덧글(0)

극락에 가까이 다가서다

세상에 둘도 없는
지극한 즐거움을 맛보시려는가

진천 보탑사에
적조전寂照展이라고 있는데
툇마루에 앉아 보시라
꽃살문을 살며시 열어보시라
와불臥佛 옆에 누워보시라
방안으로 들이닥친
햇살에 몸을 맡기시라

제 아무리 좋은 눈도
기껏 몇 십리요
제 아무리 밝은 귀도
불과 몇 리일뿐
아무려나 눈을 감고 귀를 닫고
허공이든지
바다든지
두둥실 흘러가시라

그렇게 몇 겁을 가다가
닿는 곳이 있거든
암흑 같은 두 눈을 열고
절벽 같은 두 귀를 열어 놓으시라

젖내음이 나지 않는가
살이 없어지고
뼈가 사라지고
어머니의 궁속으로 들어가 있지 않는가

by 구석기 | 2009/11/09 13:09 | 구석기의 시 | 트랙백 | 덧글(0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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